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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결이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한 해의 끝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는 가을의 문턱에 서면, 유독 시간의 흐름이 또렷하게 피부로 와닿곤 합니다. 숨 가쁘게 달려온 날들을 돌아보다 문득 마음 한구석에 서늘한 공허함이 번지거나, 깊은 고독과 외로움이 불쑥 찾아오는 순간을 마주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이가 차고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면 저절로 어른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회가 정해준 나이의 기준을 넘어선 뒤에도, 문득 혼자 남겨진 방 안에서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정말 어른이 된 걸까? 내 방식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임상 현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어른들이 털어놓는 공통된 고백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실감하는 순간 엄습하는 서늘한 외로움’입니다. 어릴 적에는 삶이 버거울 때 기댈 누군가를 찾거나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대상을 바랐지만, 어느 순간 문득 뼈아픈 자각이 찾아옵니다. 내 삶에서 마주하는 불안과 선택, 그리고 그에 따르는 모든 결과를 세상 그 누구도 대신 짊어져 줄 수 없다는 사실을요.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 위에 홀로 배를 띄우고 노를 저어야 한다는 이 자각은, 머리로 이해하기 이전 온몸으로 스며드는 절대적인 고독을 데려옵니다.

      하지만 이 외로움과 공허함은 내가 무언가 부족하거나 삶을 잘못 살아서 생기는 결핍의 징후가 아닙니다. 오히려 타인의 기준과 의존에서 벗어나 내 삶을 오롯이 마주하고 있다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건강한 심리적 신호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이 강조한 ‘개성화(individuation)’의 여정처럼, 한 인간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고독의 터널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외로움이 찾아왔을 때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서늘한 감정을 견디지 못해 관계에 무리하게 매달리거나, 바쁜 일과 자극으로 감정을 덮어버리려 합니다. 외로움을 나를 집어삼키려는 적이자 결함으로 여기며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입니다.

      불교 경전에는 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는 일화가 등장합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번뇌와 유혹, 두려움의 상징인 악마 마라는 붓다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라는 붓다가 숲에서 홀로 명상할 때마다 불쑥 나타나 마음을 뒤흔들려 했습니다. 어느 날 마라는 어두운 숲속에 혼자 앉아 있는 붓다에게 다가가 속삭입니다.

      “너는 이 어두운 숲속에 홀로 앉아 슬픔과 외로움에 빠져 있는가?
      벗 하나 없이 어찌 홀로 지내는가?”

      고립감과 결핍을 건드려 마음을 무너뜨리려는 시험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외로움에 휩쓸려 두려워하거나, 그 감정을 부정하며 마라와 격렬하게 싸우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는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마라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습니다.

      “마라여,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정체를 들킨 마라는 붓다가 자신을 꿰뚫어 보았음을 깨닫고 힘을 잃은 채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명상가인 타라 브랙(Tara Brach)은 저서 《받아들임》 등에서 이 장면을 현대 심리학과 마음챙김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붓다가 마라를 쫓아내거나 물리친 것이 아니라, “마라여, 내가 너를 본다. 들어와서 함께 차나 한잔하자꾸나”라며 환대했다는 비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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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학에서는 이를 ‘알아차림’과 ‘탈중심화’, 그리고 정서의 ‘수용’으로 설명합니다. 외로움이라는 마라는 어둠 속에서 “너는 혼자이고 불완전해”, “너의 삶은 고립되었어”라며 ‘나의 실체’인 척 숨어 들어올 때 가장 강력해집니다. 감정과 나를 동일시하는 순간 우리는 끝없는 무력감에 빠집니다.

      하지만 외로움이 찾아왔을 때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아, 내 마음에 외로움이라는 손님이 찾아왔구나” 하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감정은 실체를 잃고 나를 지배하던 힘을 내려놓습니다. 마라에게 차를 대접하듯, 내 안에서 일어나는 고독과 쓸쓸함을 적으로 대하지 않고 곁에 나란히 앉혀두는 것입니다.

      어른의 성장은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외로움이 불쑥 찾아올 때마다 도망치는 대신, 그 감정을 담담히 알아차리고 마주 앉을 수 있는 내면의 품을 넓혀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온전히 기댈 수 없는 이 고독한 삶을 이제는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누구를 믿고 나아갈 것인가?’

      마침내 그 서늘한 자리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나 자신을 온전히 믿기로 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비로소 어른의 진짜 출발선이 열립니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내 인생이기에, 다른 이의 정답이나 세상의 시선에 기대지 않고 오직 내 안의 나침반을 신뢰하며 나만의 보폭으로 걸어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깊어 가는 가을, 불쑥 고독과 공허함이 발끝을 맴돈다면 너무 불안해하거나 스스로를 다그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감정은 길을 잃었다는 낙오의 신호가 아닙니다. 밖을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어 내면의 나를 바라보고, 내 삶의 주권을 온전히 나에게로 가져오고 있다는 성장의 초대장입니다.

      오늘 하루는 마라에게 조용히 찻잔을 건네듯, 내 안의 외로움을 가만히 마주해 보면 어떨까요.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고독의 순간마다, 결국 끝까지 곁을 지키며 여기까지 삶을 이끌어온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습니다.

      외로움 속에서도 나를 온전히 믿기로 한 바로 지금,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단단하고 온전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 참고자료: 《나는 꽤 괜찮은 내가 될 거야》 이승욱 저, 생각학교 출판
      AUTHOR
      설진미 삼정KPMG 전임 심리상담사
      성균관대학교에서 임상심리학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고려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임상심리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으며 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 임상심리실에서 슈퍼바이저로 경력을 쌓았다.

      현재는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10년간 일하며 심리상담, 조직컨설팅, 강좌 및 연구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형 표준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 개발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조직에 속한 직장인들을 만나 삶의 불안과 고통, 갈등을 성찰하고 성장을 모색해 왔으며, 조직문화를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