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에서 노래로 :
정신건강의 날에 다시 쓰는 치유의 언어


누군가에게 내가 겪은 잘못이나 아픔, 상처를 솔직히 털어놓을 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고립감이 조금은 덜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그 과정 속에서 이미 치유가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호에서는 수치심을 숨기지 않고 마주했을 때 어떤 힘이 발휘되는지, 심리 상담사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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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최근 미국정신의학회 신문 Psychiatric News 2025년 9월호에 실린 셀만 아지즈 미르(Sehlman Aziz Mirza) 박사의 글이 눈길을 끕니다. <K-Pop Demon Hunters>라는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현대인의 수치심을 분석한 칼럼입니다. 미르 박사가 주목한 것은 주인공 ‘루미(Rumi)’입니다. 이 작품에서 세계적인 K팝 그룹 ‘HUNTR/X’는 악마 사냥꾼으로서 음악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지켜내는 영웅들입니다. 하지만 그룹의 멤버인 루미는 남몰래 끔찍한 비밀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악마였던 탓에, 그녀의 피부에는 숨길 수 없는 악마의 빛나는 패턴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비밀은 루미의 삶을 지배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킬까 두려워 동료들과 친밀한 자리를 필사적으로 피하고, 결국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목소리마저 억누르게 됩니다.

미르 박사는 여기서 수치심의 본질을 짚어냅니다. 심리학적으로 수치심은 단순히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라는 깊은 자기혐오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루미의 수치심은 자아를 분열시키고, 진정한 자기를 숨기며, 진정성 대신 가면을 택하게 만듭니다. 루미의 비밀은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정서적 억압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한 인간의 처절한 생존 이야기인 것입니다.

루미의 이야기는 비단 판타지 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직장인에게 수치심은 공기처럼 존재하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에서의 사소한 실수,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받은 상사의 질책, 동료의 성과와 비교되며 느끼는 초라함. 이런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단순한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넘어섭니다. 죄책감이 ‘내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후회라면, 수치심은 ‘나라는 존재 자체가 결함이 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기 존재에 대한 총체적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문제는 이 고통스러운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감추려 할 때 시작됩니다. 수치심을 숨기는 행위는 우리 영혼에 빚을 지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하며, 개인과 조직 모두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첫째, 가면을 쓰는 대가로 우리는 ‘진정한 나’를 잃어버립니다.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유능하고 완벽한 직원의 가면을 쓰고, 실수하지않는 인간을 연기합니다. 나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면 거부당할 것이라는 불안은 만성적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며, 결국 정신 에너지를 소진시킵니다.

둘째, 성장을 멈추는 대가를 치릅니다. 수치심은 우리를 안전지대에 머물게 하는 족쇄입니다. 실패가 곧 존재의 실패로 느껴지기에, 도전적인 과제를 피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보다 침묵을 택합니다.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들을 스스로 박탈하는 것입니다.

셋째, 진정한 연결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릅니다. 수치심은 ‘나만 이렇다’ 깊은 고립감을 동반합니다. 나의 약점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기에 동료와 유대를 맺기 어렵고, 피상적 관계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이는 협업의 질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의 정서적 지지 기반을 약화시켜 우리를 더욱 외롭게 만듭니다.

주인공 루미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비밀과 상처를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그것을 음악의 언어로 표현해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고 타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는 수치심을 다루는 중요한 심리적 원리를 보여줍니다. 억압하고 회피할수록 괴물이 되어 우리를 잠식하는 감정을, 창의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재구성하고 표현할 때 비로소 그것을 통제하고 의미를 부여할 힘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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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러한 ‘노래’를 만들 수 있습니다. 팀 회의에서 ‘사실은 나도 지난번 프로젝트에서 비슷한 실수를 했다’고 용기 내어 고백하는 것, 동료의 힘든 표정을 알아채고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잠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신건강 문제 역시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 신뢰할 만한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됩니다. 우리 사회의 ‘정신력으로 이겨내라’는 편견 때문에 망설여지지만,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 상담사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수치심이라는 독백을 나눔과 연결이라는 대화로 바꿀 때, 그 파괴적 힘은 비로소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됩니다.

10월 10일 정신건강의 날을 맞아, 우리 자신과 조직을 돌아봅시다. “나는 수치심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우리 조직에서 실패와 약점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같은 질문 말입니다. 수치심을 완전히 없앨 수도, 없애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수치심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고 나누며 새로운 이야기로 바꿔나가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Profile
설진미 삼정KPMG 전임 심리상담사

성균관대학교에서 임상심리학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고려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임상심리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으며 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 임상심리실에서 슈퍼바이저로 경력을 쌓았다.

현재는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10년간 일하며 심리상담, 조직컨설팅, 강좌 및 연구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형 표준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 개발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조직에 속한 직장인들을 만나 삶의 불안과 고통, 갈등을 성찰하고 성장을 모색해 왔으며, 조직문화를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