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를 넘어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기회로
최근 미국은 국방력 강화와 중국 조선업 견제를 위해 한국과의 협력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군함과 잠수함의 MRO(Maintenance·Repair·Operation, 유지·보수·운영)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력을 높이 평가하며, 미국이 먼저 손을 내미는 이례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25년 들어 한미 고위급 회동에서는 군함 건조, 기술 협력, 인력 양성 등이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으며, 미국 고위 인사들이 직접 한국 조선소를 찾는 등 협력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경제 협력을 넘어, 전략적 동맹 강화를 위한 미국의 절박한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한국 조선업은 뛰어난 MRO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국 국방 전략의 핵심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 조선업, 위기 속 전환점은? MRO 산업이 새 돌파구로
한국 조선업이 2024년 중국에 글로벌 1위 자리를 내주면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MRO 사업 확장이 핵심 전략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때 한국보다 크게 뒤처졌던 중국 조선업은 정부의 강력한 기술 개발 지원과 저가 공세를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에 맞서 국내 조선업체들은 수익성 중심의 선별 수주 전략으로 수익 극대화를 추구하고 있지만, 시장 점유율 감소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커지고 있다.이처럼 국가 간 조선 기술의 격차가 줄어들며 제품 차별화가 점점 어려워지는 가운데, MRO 산업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유망한 분야로 주목받고 있다. 조선 MRO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유지·보수와 신조선 건조를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한국 조선업에 대한 협력 요청이 이어지면서 군함 MRO 시장이 주목받고 있지만, MRO는 군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핵심 분야는 바로 민간 선박 MRO 시장이다.
노후 선박 증가, 수리·보수 수요 급증
2000년대 초 해운시장이 호황을 누리며 선박 발주가 급증했고, 이제 그 선박들이 노후화됨에 따라 수리 및 유지·보수에 대한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2023년 기준, 글로벌 운항 가능 선박 중 15년 이상 된 노후 선박의 비중은 37.7%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며 본격적인 교체 사이클에 접어들었다. 일반적으로 선박 교체 주기를 약 25년으로 볼 때, 현재 건조량의 50~70%는 2000년대에 발주된 선박의 대체 수요로 분석된다.
Source: 삼정KPMG 경제연구원
친환경 규제가 불러온 MRO 수요의 전환
친환경 규제의 강화도 MRO 시장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30년까지 탄소집약도를 40% 감축하고,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8년 대비 100% 감축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에 따라 2023년부터 환경 규제가 본격 시행되면서, 신조선뿐만 아니라 기존 선박에도 친환경 설비의 도입이 확대되고 있다. 연료유 교체, 스크러버 장착, 엔진 부하 최적화, 부유식 저장·재기화 설비(FSRU, Floating Storage Regasification Unit) 등 다양한 친환경 솔루션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디지털화가 이끄는 MRO 산업의 혁신
선박의 디지털화는 MRO 산업의 또 다른 성장 촉진제다. 최근 해운업계에서는 디지털 트윈, AI 기반 예측 유지·보수, IoT 센서 기술 등이 도입되며 선박 운영의 효율성과 안전성이 크게 향상되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 기술을 통해 선박의 실시간 상태 모니터링이 가능해지면서, 고장 발생을 사전에 예측하고 최적의 정비 시점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정비 비용 절감은 물론, 예상치 못한 운항 중단을 최소화하는 데 기여한다.
자율운항 시대, 소프트웨어 유지·보수가 새 격전지
더불어, 선박의 자동화와 자율운항 기술의 발전으로 소프트웨어 유지·보수 및 사이버보안 역시 MRO 시장의 새로운 분야로 부상하고 있다. 선박 시스템이 점차 네트워크 기반으로 전환되면서 사이버 공격에 대한 리스크가 증가하고 있어, 이에 대한 예방 및 대응도 필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결과적으로 디지털화는 전통적인 기계 및 설비 중심의 MRO를 넘어, 데이터 기반 정비와 소프트웨어 유지·보수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향후 MRO 산업의 핵심 성장 동력 중 하나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전망된다.
19세기 영국의 정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기회가 왔을 때 즉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성장이 절실한 한국 조선업에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온 지금, 우리는 과연 그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