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일감증후군: 일감이 없으면 내가 도태되는 걸까?
업무를 하다 보면 일감이 몰리는 바쁜 시기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비시즌도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쁜 일정을 마치고 나면 휴식을 통해 마음의 여유가 찾아올 거라 기대하지만, 때로는 일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함을 가져오기도 한다. 비시즌의 불안함 속에서 어떻게 진정한 쉼을 찾을 수 있을지,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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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직장인들은 흔히 고강도 업무를 수행합니다. 프로젝트 중심으로 업무가 진행되다 보면, 업무가 한가해지는 비시즌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휴식’을 취하기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막상 일이 줄고 한가한 시기가 오면 편안함 대신 불편함이 밀려옵니다.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 시간 동안 무기력해지거나 자신이 도태될 것만 같은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정말 일감이 없으면 나의 가치가 줄어드는 걸까요? 많은 직장인들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직업과 연결시킵니다. ‘일’이라는 것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을 넘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증명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비시즌이 되어 일이 잠시 멈추거나 줄어들면 자신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런 현상을 ‘빈일감증후군’(Empty Job Syndrome)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는 일이 없거나 한가해진 상태에서 느끼는 무력감이나 공허감으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특히 업무 강도가 높은 직종일수록 이 공백감을 더욱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비시즌이 오면 ‘일이 없는 나’는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결국 또 다른 일을 찾아 나서거나, 제대로 쉬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일을 통해 ‘자기감(Self-Sense)’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일을 통해 얻는 성취감과 인정은 단순한 보상을 넘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방식입니다. 마치 도파민이 과다 분비되듯, 일에서 오는 성취감은 우리의 존재감을 극대화하는 자극제가 됩니다. 결국 일에 대한 집착은 자기감을 얻는 방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일이 사라지면 이 자기감 또한 희미해지고, 공허함과 불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자기감(Self-Sense)은 말 그대로 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생생히 느끼는 감각입니다. 이는 단순히 일을 하며 얻는 성취감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업무와 성취에서 오는 자기감은 외부 환경과 연결되어 있으며, 끊임없는 자극과 인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감은 외부의 인정이나 성취가 아닌, 자신이 존재하는 그 자체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치 우리가 강아지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스럽게 여기고, 함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듯 자기감 역시 나 자신이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충분히 인정받고 가치 있다고 느끼는 감각입니다.

예를 들어 산책하며 느끼는 신선한 공기, 따뜻한 차 한잔에서 오는 편안함,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따뜻한 교감 등이 바로 존재의 자기감입니다. 자기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우리는 외부의 인정과 성취를 끝없이 갈망하게 됩니다. 이런 자기감 결핍은 결국 일에서 벗어났을 때 불안과 공허함을 만들어내고, 이를 다시 일로 메꾸려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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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기감을 회복하는 방법은 ‘내가 나로 존재함으로써 기쁜, 즐거운 순간’을 자주 경험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업무와 무관하게 자신이 가장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들을 자각하고, 이를 일상 속에서 의도적으로 늘려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감을 풍부히 경험할수록, 비시즌의 휴식은 더 이상 불편한 공백이 아니라 자신을 재충전하고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Profile
설진미 삼정KPMG 전임 심리상담사

성균관대학교에서 임상심리학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고려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임상심리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으며 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 임상심리실에서 슈퍼바이저로 경력을 쌓았다.

현재는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10년간 일하며 심리상담, 조직컨설팅, 강좌 및 연구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형 표준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 개발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조직에 속한 직장인들을 만나 삶의 불안과 고통, 갈등을 성찰하고 성장을 모색해 왔으며, 조직문화를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