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 이야기: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열심(熱心)

어느덧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우리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당연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큼이나 개인의 여가, 건강,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긴 근무 시간이 곧 성과로 이어진다는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 오늘날에는 생산성 향상과 삶의 질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2024년을 겨우 두 달 남긴 지금, 올 한 해 열심히 달려온 만큼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실천 방법을 전문가의 조언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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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과 삶의 균형, 그리고 공정성

워라밸(Work-Life Balance)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퇴근 후에도 머릿속은 여전히 회사 업무로 가득 차 있고, 프로젝트가 몰리면 야근은 기본이다. 밤이든 주말이든 상사의 ‘퇴톡(퇴근 후 카톡)’도 무시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물론 모든 직장인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난달 한겨레 조사에 따르면, ‘일과 삶의 균형이 잘 이뤄지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고작 30.8%에 불과했다. 직장인 10명 가운데 7명이 불균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일과 삶의 불균형 문제가 나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희생하며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이 열심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회사에서 ‘공정성이 훼손되었다’고 느낄 때다. 나름대로 동료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았는데도, 기대했던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직장인들은 깊은 실망과 허탈감을 겪는다.

실제로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에서 직장인 1만 4425명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도 이와 유사하다. 보상에 대한 부적절한 느낌(금전, 직업 만족도, 동료 존중 등)은 우울증이 없는 사람에게조차 극단적인 생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이는 회사 내 공정한 대우와 보상이 직장인의 심리적 안정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 진정한 우선순위 찾기

상담실에서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힘든 걸까요?” 많은 직장인들이 열심히 사는 데도 허탈감과 배신감, 무기력감을 느낀다고 호소한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직장인들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이렇게 참고 있는지를 묻기 시작한다. 찬찬히 답하다 보면, 결국 이 대답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우선순위는 없고, 열심(熱心)만 있는 삶’은 워라밸이 결여된 삶의 동의어처럼 들린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성공과 성실함을 좇으며 살지만, 정작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하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만 사는 것 같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쓸지 결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일과 삶의 경계는 모호하다. 이 모호함은 불확실하고 늘 불안을 동반한다. 그러다 보니, 긴박성과 중요성을 동시에 지닌 업무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 점점 내 삶의 1순위가 일이 된다. 점점 여가 시간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자신의 건강과 마음을 돌보는 일도 뒷전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된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바빠 성찰할 기회를 놓친다. 어느 날 문득 직장에서의 성취는 이뤘지만, 번아웃과 공허함만 남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놓친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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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워라밸을 위한 첫걸음: 나에게 묻는 시간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무엇을 우선시할지 명확히 해야 한다. 그래야 삶에 일관성이 부여되고 예측 가능해져서 외부의 요구에 덜 휘돌리게 된다. 더 나아가 단순한 시간 관리가 아닌, 자신의 가치와 목표를 재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으면 불필요한 업무에 매달리는 것을 피하고, 직장에서의 기대를 조정할 수 있다. 물론, 책임감은 직장인으로서 늘 따라오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을 돌볼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단순히 일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우리는 어떻게 일과 삶의 불균형을 해결할 수 있을까? 쉽게 말하기도 어렵고, 정답도 없다. 하지만 우선순위가 없는 삶은 결국 나를 배신한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워라밸을 이루는 첫걸음이다.

Profile
설진미 삼정KPMG 전임 심리상담사

성균관대학교에서 임상심리학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고려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임상심리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으며 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 임상심리실에서 슈퍼바이저로 경력을 쌓았다.

현재는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10년간 일하며 심리상담, 조직컨설팅, 강좌 및 연구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형 표준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 개발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조직에 속한 직장인들을 만나 삶의 불안과 고통, 갈등을 성찰하고 성장을 모색해 왔으며, 조직문화를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