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 어린 시절 겪는 사춘기처럼 정체성 혼란의 시기가 성인이 된 직장 생활을 하며 일어나기도 한다. 세 가지 단계로 직장인으로서 겪는 정체성 혼란의 시기를 살펴보고, 이를 극복하고 해결하는 법에 대해 들어본다.
# 누구나 겪는 정체성 혼란의 사춘기
인생에는 두 번의 큰 위기가 있다. 한 번은 자신이 사춘기를 겪을 때이고, 또 한 번은 자식이 사춘기일 때다. 사춘기는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무섭고 힘든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인생의 지랄 총량이 폭발하고,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겪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 혼란을 극복하고 지금의 자리에 있지만, ‘정체성’이라는 단어는 전공자인 나조차도 모호하게 느껴진다.
‘정체성(Identity)’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idem’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동일하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인터넷을 사용할 때마다 ID(Identity Code)를 통해 자신과 동일한 존재임을 증명한다. 정체성 문제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누구와 같은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청소년기에 또래집단이 중요한 것처럼, ‘타인’이 중요하다. 우리는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는 누구와 같은가?’, ‘나는 어떻게 다른가?’를 느끼며 자신을 형성한다.
# 성인기에도 발생하는 정체성 혼란의 시기!
정체성 혼란이 사춘기의 전유물 같지만, 성인기에도 발생한다. 직장인으로서 역할이 변하고 직급이 올라갈 때 자주 직면하게 된다. V. Lenhardt*는 직장인의 성장 단계를 전문가, 매니저, 리더로 크게 세 단계로 나눴다. 첫 번째는 전문가(Specialist) 단계로 입사하여 팀원으로서 ‘기술과 콘텐츠’를 갖추는 시기다. 이 시기에는 조직 문화를 수용하고 선배나 동료와 자신을 비교하며, 동일시 과정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키워 나간다.
두 번째는 매니저(Manager) 단계로, 팀을 관리하고 사람을 이끄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조직의 ‘프로세스’를 잘 운영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상사나 닮고 싶은 매니저를 모델로 삼아 자신의 관리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리더(Leader) 단계는 ‘조직의 전략과 의미, 비전, 방향’ 등을 설정하고 조직 전체의 성과를 관리한다. 리더는 조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며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여 리더십 스타일 자체를 모델링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 세 단계는 직장인으로서의 성장 과정이지만 각 단계에서 역할 혼동과 정체성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전문가 단계에서는 끊임없이 이 조직이 나와 맞는가 고민하게 된다. 또한, 지시와 통제하는 상사와 경쟁 관계에 있는 팀원들과 협력하고 경쟁하며 불안을 겪는다. 매니저로 승진하면서는 중간 관리자로서 위아래로 치이며, 전문가로서의 경쟁력도 유지해야 하므로 부담이 더 커진다. 이 단계에서 충분한 역할 모델이 없다면, 심리적 혼란을 견디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임원급인 리더가 되면 과도한 책임에 시달리고 때로는 불합리한 비난도 견디며 개인의 삶을 희생해야 할 때도 있다. 가진 권한만큼 훨씬 고독하고 타인의 기대는 더 높다.
* Characteristics of the three stages of manager’s development
# 처음은 누구나 서툰 법! 스스로를 토닥이며 응원해야
이런 이유로 요즘 MZ세대의 절반이 임원 승진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전문가, 매니저, 리더 모두 조직이 원하는 역할과 기능을 가진 직업적 옷일 뿐이다. 군복, 경찰 제복, 소방관복처럼 옷에 따라 신분과 역할이 정해지는 것처럼 직장인도 직급에 따라 특정한 옷을 입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러한 직급의 옷이 때로는 개인의 정체성과 맞지 않아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옷이 진정한 내가 될 수 없듯이, 조직에서의 역할과 기능이 내가 될 수는 없다. 단지, 새로운 옷이 요구되는 사회적 장면에 노출되었을 뿐이고 그동안 입어본 적이 없는 옷이기에 처음에는 서툴 수밖에 없다. 이는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과정이다.
그러나 많은 직장인들은 이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특히 완벽주의나 높은 포부를 가진 사람들은 서툰 자신의 모습을 좌절이나 실패로 받아들이기 쉽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 ‘남들처럼 왜 이렇게 사회성이 부족할까?’, ‘남들만큼 왜 나는 해내지 못할까?’라고 자책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자기 인식은 스스로를 조직과 직급에 부적합한 존재로 여기게 만들 수 있다. 이보다는 ‘이 정도면 잘하고 있다’는 스스로를 토닥이는 말이 필요하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서투름을 응원하고 사랑한다. 새로운 역할이 요구될 때 서툴 수 있으며 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처음이라 뒤뚱거리는 불편한 순간을 잘 견디면 어느 순간 새로운 옷이 자신의 옷장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설진미 삼정KPMG 전임 심리상담사
성균관대학교에서 임상심리학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고려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임상심리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으며 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 임상심리실에서 슈퍼바이저로 경력을 쌓았다.
현재는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10년간 일하며 심리상담, 조직컨설팅, 강좌 및 연구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형 표준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 개발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조직에 속한 직장인들을 만나 삶의 불안과 고통, 갈등을 성찰하고 성장을 모색해 왔으며, 조직문화를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